“병원은 약육강식 정글… 건강의 상품화 안돼”
가난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저소득층, 희귀병으로 한순간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중산층 가정…. 우리 사회의 의료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환자들을 보다 못한 한 의사가 ‘청진기’ 대신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섰다. 화제의 주인공은 현직 산업의학과 전문의인 다큐멘터리 감독 송윤희(32)씨. 그가 전문성을 살려 카메라에 담아낸 영화가 바로 한국의 첫 의료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이다. 감독의 카메라에 비친 우리 병원은 상업주의에 물들어 환자 유치에 열을 올리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름없었다. 최근 경기 안산의 작업실에서 송 감독, 남편이자 제작자인 안산의료생활협동조합 이선웅 원장을 만나 ‘그들만의 얘기’를 들었다.
경기 안산의 작업실에서 마무리 영화제작 작업을 하고 있는 송윤희(앞쪽) 감독과 남편 이선웅씨. 송 감독과 마찬가지로 현직 의사인 이씨는 영화 ‘하얀 정글’의 제작자로 참여했다.
-의대 시절에도 영화를 배운 적은 있었고, 지난해 다큐멘터리 제작학교에서 기획안으로 제시한 작품이 바로 ‘하얀 정글’이다. 예전부터 정말 다루고 싶었던 주제여서 기획 때부터 열심히 준비했다. 처음에는 10~20분 분량으로, 의료 소외계층에 앵글을 맞췄다가 ‘이렇게 만들면 인간극장밖에 안 되겠다. 다큐멘터리가 사람을 짠하게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의료시스템 문제까지 포함시켜 83분짜리로 만들었다.
→현직 의사인 남편이 제작자로 참여한 것도 재미있다.
-지난해 6~7월쯤 남편이 전해준 이야기도 모티브가 됐다. 남편이 돌본 환자 중에 가난 때문에 치료를 못 받아 심각한 합병증을 겪는 당뇨 환자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런 사람도 있으려니 했는데 막상 남편이 그 환자를 걱정하는 걸 지켜보면서 의료 취약계층의 문제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편은 촬영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틈틈이 함께 토론하고 아이디어도 구상했다.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한 셈이다.
→기자도 취재가 어려운 곳이 병원이다. 병원은 촬영이 쉽지 않은 곳 아닌가.
-카메라를 들고는 병원에 들어서기도 어렵다. 지인을 통해 병원에 갔는데 환자들이 카메라를 보더니 “지금 여기서 뭐 하느냐.”며 경계를 했다. 친구인 인턴을 인터뷰할 때는 도망다니다시피 하며 촬영했다. 병원 폐쇄회로(CC)TV를 피해서 촬영하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중단했다가 다시 하기를 반복했다.
→섭외는 어렵지 않았나.
-물론 어려웠다. 한번은 친하다고 생각한 의사 선배를 섭외했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그 선배의 심경이 바뀐 이유는 모르겠다. 그걸 안다면 현재 의료제도가 왜 안 바뀌는지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상의로서 밤잠도 못 자고 녹초가 된 상태로 4~5년을 살아온 선배가 가진 의료에 대한 관점이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더불어 영화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의사, 병원관계자는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인터뷰에 응해준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촬영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은.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태어나 세상을 떠난 아기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너무 진솔하게 인터뷰를 해 주었다. 아기는 1년 6개월을 중환자실에서 지내며 여섯 번의 큰 수술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 아버지는 시민모금을 통해 수억원의 돈을 댔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무상의료가 무엇을 말하는지 느끼지 않겠나. 재난적 의료비 지출로 중산층까지 고꾸라지게 만드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분은 의료민영화를 ‘살인 행위’라고 단정했다. 칼을 들어야만 살인이 아니라면서….
→관객들 반응은 어땠나.
-3월 인디다큐 페스티벌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을 때, 이런 형식이 새롭다는 반응이 많았다. 내 영화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등 그래픽이 많이 나온다. 정보를 쏟아낸다.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전문가들 반응은 오히려 좋았다. 특히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문정현 감독께서 전화를 주셨을 때는 깜짝 놀랐다. 평소 존경하는 감독이었는데 ‘좋은 영화 만들어줘 고맙다.’고 격려해 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영화 제목이 인상적이다.
-원래 제목은 ‘아파도 담벼락’이었다. 몸이 아파도 벽을 바라보는 것 같은 암담한 현실을 담았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하얀 정글 속의 하얀 가운들, 이 정글의 법칙은 누구도 따르고 싶지 않다.’는 멘트가 있는데 이를 본 스태프가 ‘하얀 정글’이 좋겠다고 추천했다. 남편 말처럼 드라마 ‘하얀거탑’을 따라한 것은 아니다(웃음).
→우리 의료의 문제는 무엇이며,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또 무엇인가.
-사실 전 국민이 단일 보험체계의 건강보험을 가진 국가는 많지 않다. 그것을 우리는 짧은 시간에 이뤘다. 건강보험은 훌륭한 제도다. 하지만 의료재정은 건강보험이 책임지는데 공공병원은 전체의 10%가 안 된다. 재정은 공공이, 생산체계는 민간이 맡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영화의 최종 메시지는 결국 사회적 연대정신이다. 건강평등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적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건강이 상품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다음 작품은 무엇을 구상 중인가.
-산업보건계 안에 많은 문제가 있다. 기업 자본은 병원 자본과는 수준이 다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타이어 사망사건 등은 모두 쉬쉬하려고만 한다. 사업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산업보건 분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
글 사진 안석기자 ccto@seoul.co.kr
2011-06-07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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