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 前총리 ‘대한민국 총리’를 말하다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어떤 자리일까. 박근혜 정부 출범 2년 3개월 만에 여섯 번째 총리 인선을 앞두고 있다. 세간에서는 ‘총리 잔혹사’라는 말도 회자된다. 국정 2인자로 대통령 유고 시 계승 서열 1위인 총리 위상은 ‘가속도가 붙은 채’ 추락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 ‘책임 총리’ 구현이었지만 현실 정치 속의 총리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생명’으로 비친다. 이명박(MB) 정부에서 2년 5개월간 재임하며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김황식 전 총리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듣게 된 이유다. 지난 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의 개인 사무실. 인터뷰 5분 전이어서일까. 막 넥타이를 매고 있던 김 전 총리는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5월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고배를 든 후 언론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다. 표정은 밝고 환했다. 김 전 총리는 여느 정치인 인터뷰와 달리 사전 질문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70분간 ‘즉문즉답’이 이어졌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개인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단독 인터뷰 도중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고 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먼저 ‘장수 총리의 비결이 궁금하다’고 묻자 “운이 좋았다”는 싱거운 답이 나왔다. 스스로 답변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나 자신의 노력보다는 대통령과 주변에서의 지원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얼핏 대통령에게 가린 ‘국정 2인자’의 현실이 느껴졌다. 그는 총리 재임 때 스스로를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드는” ‘이슬비 총리’라고 불렀다.
김 전 총리에게 ‘국민들 눈에 총리가 없어도 그만인 자리처럼 보인다’고 하자 “총리직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라면서도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정치 현실에서 대통령이 권한과 책임을 총리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굉장히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고 말했다.
‘다시 총리직 제안이 오면 뜻이 있나’라고 묻자 “이미 했던 사람이 다시 하는 건 맞지 않는다. 국민들은 새 사람이 새롭게 잘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김 전 총리는 총리 제도를 넘어 우리 권력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를 해법으로 봤다.
그는 “현행 헌법에 간단하게 규정된 것만으로는 총리 역할과 지위가 불안정하다”며 “대통령을 보좌하고 협조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견제도 할 수 있는 그런 총리제가 되지 않으면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왕적 대통령제의 여러 폐단이 현실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걸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직설적으로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
→총리 후보들의 잦은 낙마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나.
-누구나 장점과 약점이 다 있다. 그동안 보면 괜찮은 분들도 많았는데 본격적인 검증이 이뤄지기도 전에 흠결부터 부각되면서 동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네거티브 쪽에 초점이 많이 맞춰지다 보니 능력이나 자질은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아울러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인선 문제도 있었다.
→어떤 총리가 필요하다고 보는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해 각 행정부처와 중앙, 지방정부 간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 많기 때문에 경륜이나 업무 능력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국민, 언론, 정치와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정치권에서 호남 총리론 얘기도 나오는데.
-총리를 어느 시점에 호남에서 해야 한다, 충청에서 해야 한다는 건 맞지 않는다. 전체 인사에서는 지역 균형과 탕평이 필요하지만 이 국면에서 특정 지역 출신을 총리 후보자로 물색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 시점에서 가장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분을 뽑는 게 중요하다.(전남 장성이 고향인 김 전 총리는 정부 수립 후 첫 전남 출신 총리다.)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의 “(장관직에 대해)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 같다”는 말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 눈에 총리가 그런 자리로 비치는 측면이 있다.
-대통령 권한이 아주 막강한 우리 정치 현실에 비춰 대통령이 소정의 권한과 책임을 총리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총리 제도는 굉장히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현행 총리제를 어떻게 활용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지 같이 고민해야 한다. 운영상의 문제도 있지만 헌법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총리제의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나.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와 달리 우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총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권력 구조가 있는데 국가 운영과 관련해 총리가 대통령과 분업하고 협조하며 필요하다면 견제까지도 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서는 간단하게 총리 역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총리 역할과 지위가 불안정하다. 막강한 대통령중심제에서 총리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
→개헌을 전제로 하는 말로 들린다.
-1987년 헌법은 장기 독재를 막는다는 시대적 사명을 담았고, 충실히 이행했다. 지금 시대와 사회에 맞는 권력 구조를 생각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제왕적 대통령중심제의 여러 폐단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의 장기 계획을 갖고 있는 비전 있는 지도자라면 10년이라도 할 수 있고 잘못하면 중간에 바꿀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보다는 분산된 권력이 타협하고 절충하는 과정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힘도 생긴다고 본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꼽자면.
-대통령의 생각이 국가 운영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스템 자체를 지적하고 싶다.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방향이 설정되는데 그런 역할은 필요하지만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수렴하고 걸러내는 그런 부분보다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건 지금 시대에 배치된다.
정치권 내부에서 개헌 논의 요구는 많지만 잘 발화되지 않는다.
-특정 시점을 정해 두고 개헌 논의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평시에 정치권에서 자유롭게 논의돼야 한다. 공감을 얻으면 개헌할 수 있고 아니면 늦어질 수도 있다. 일도양단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 장래와 직결된 만큼 후다닥 해치우기보다는 항상 논의가 돼야 한다.
→여야, 보수, 진보를 떠나 박 대통령의 소통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여전히 나온다.
-박 대통령 나름대로 소통 통로가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이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소통이 된다고 평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은 해외 자원외교 수사가 결정적이었다. MB 정부 총리로서 해외 자원개발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정부 안에 있었지만 해외 자원외교는 관여하지 않아 잘 모른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투자를 하다 보면 실패할 수 있고, 그런 걸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투자를 하는 데 비리가 있다거나 부당한 투자가 이뤄진 건 엄중히 밝혀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검찰 조사가 나올 때까지 자원외교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지난해 7·30재보선부터 차출설이 나오곤 했다. 출마 고려한 적이 있나.
-출마 생각을 해 본 적 없고 공식적으로 요청받은 바도 없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최근 “김 전 총리는 정치적으로 할 일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이 어떤 취지로 한 말씀인지는. 선의로 해석한다면 내가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뭐라도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인지(웃음). 지금은 한마디로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 않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국민연금 문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이 인터뷰는 6일 밤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가 무산되기 전 이뤄졌다.)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름대로 진전 있는 합의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정치권이 합의를 통해 개혁안을 제시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국민연금 문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논의의 장을 열어 국민 전체의 의사와 사회적 합의를 이뤄 나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여야 각자 입장이 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결정한 것인지, 정치적 이해나 포퓰리즘적 접근은 없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나로서는 최근 노사정 대타협 논의가 결렬된 게 가장 아쉽게 느껴진다.
→7월에 열리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의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남북 단일팀 가능성은.
-이미 시간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북한도 단독으로 팀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남북 교류 차원에서 백두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육로를 통해 남쪽으로 가져오고 무등산에서 채화한 성화와 합화하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 북한 선수단뿐 아니라 응원단 방문 문제도 협의할 생각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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