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정부 이후 항명 없었던 정권 없어… “방탄총리 거부” 이회창 대선후보로

YS정부 이후 항명 없었던 정권 없어… “방탄총리 거부” 이회창 대선후보로

입력 2013-10-04 00:00
수정 2013-10-0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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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前장관 사태로 본 ‘항명의 정치사’

기초노령연금 공약 후퇴 논란과 관련,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군’인 박근혜 대통령의 뜻에 반해 자리를 던진 것이 ‘항명성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권에서 그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정권 초기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진 전 장관의 향후 정치적 입지에 대한 관심도 높다. 우리 정치사에 종종 등장했던 ‘항명(성) 파동’이 그 운명을 내다보게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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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명 파동’의 대표적 인물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가 꼽힌다.

1993년 2월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일면식도 없던 이회창 전 대법관을 감사원장에 앉힌 데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이 전 총리는 얼굴마담이나 방탄 총리의 역할이 아니라 총리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고 했다. YS의 핵심 측근들은 물론 YS와도 수시로 충돌했다. 결국 YS가 사임시키려 하자 이 전 총리는 취임 127일 만에 사표를 내면서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YS는 1996년 4월 총선 직전 이 전 총리를 신한국당 선대위 의장으로 영입해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해 8월 이듬해의 대선을 앞두고 당내 9룡(龍)의 대권 경쟁에서도 마찰이 빚어졌고 YS는 이 전 총리를 겨냥해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고 경고했다. 이에 이 전 총리는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다시 맞섰다. 결국 이듬해 YS는 탈당했고, 두 사람은 끝내 갈라섰다.

진 전 장관과 유사한 사례들도 있다. 2003년 7월 서울행정법원은 정부의 새만금 사업에 대한 집행정지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당시 김영진 농림부 장관은 “법원이 환경단체 등의 주장만을 근거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새만금 공사를 중단시켰다”며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했다. 행정부와 사법부 간의 대결 양상이 빚어지면서 삼권분립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공약 이행을 놓고 청와대와 여권의 갈등도 있었다. 2004년 6월 당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여당의 총선 공약인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직접 “공공주택 분양가 문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계급장을 떼고 논쟁하자”는 성명을 내며 충돌했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일어난 이른바 ‘55인 항명 파동’은 정두언 전 의원이 주축이 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하면서 빚어졌다. 55인 항명 파동은 결국 무위로 끝났지만, 정 전 의원은 그해 6월 다시 ‘권력 사유화’ 논란을 제기하는 등 ‘정권출범 1등 공신’에서 ‘여당 내 야당’으로 변신했다.

반면 2003년 9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의 ‘인적청산론’은 ‘60대 용퇴론’에서 출발, 결국 이듬해 17대 총선에서 최병렬 당시 당대표를 비롯한 현역 의원 60명 물갈이로 이어졌다.

앞서 민주당에서는 정동영(당시 최고위원) 의원이 2000년 12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당 최고위원 만찬에 참석해 정권 실세인 권노갑 최고위원의 퇴진을 공개 요구했고, 초선 의원 모임인 ‘새벽21’도 당정쇄신 건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권 최고위원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항명 파동이 항명의 주체에게 어떤 정치적 영향을 끼쳤는지 계량화하기는 쉽지 않다. 장단기적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회창 전 총재는 이후 엄청난 정치적 인기를 얻어 대선 후보로까지 나섰으나, 세 차례의 도전에도 꿈을 이루지 못했다. YS는 ‘현역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지만 못하게 할 수는 있다’는 취지의 말로, 자신이 돕지 않아 이 전 총재가 낙선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김근태 전 의장이 대선 후보 경쟁에서 막판 탈락한 것이 노 전 대통령과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많다. 정동영 의원도 권노갑 최고위원을 낙마시킨 이후 정치적 위상이 급상승하기는 했지만 이후 당내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부 정치인들은 항명은 권력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권력 장악력이 여당 및 측근들에 대한 조율을 원활하게 이뤄내지 못할 때 이 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항명’을 규정했다. 이를 전제로 하면 진 전 장관의 ‘항명 드라마’ 피날레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2013-10-0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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