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물맛” 비판에 신형 수통 전량 교체

예비역이라면 수통과 관련한 추억 하나쯤 있을 겁니다. 위생상태가 엉망일 것 같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부터 치약으로 닦았다는 얘기까지, 군 생활의 애환이 담긴 물품입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단도직입적으로 국방부에 문의해봤습니다. 시쳇말로 ‘돌직구’ 질문입니다. “6·25 때 사용하던 수통이 지금도 군에 남아있나요?”
국방부 관계자는 순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6·25 때 쓰던 수통이 지금도 남아있겠습니까.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인데요.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요.” 또 물었습니다. “그럼 30~40년 전에 쓰던 수통도 사용하지 않나요?” “아무리 보급품을 오래 쓴다고 해도 그런 건 없을 텐데요. 사용 기간을 모두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답변이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예비역들 사이에서는 6·25 전쟁 때 쓰던 수통을 받아서 썼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요?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수통은 사용 연한이 없기 때문에 파손되지 않는 한 폐기하진 않습니다.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만든 지 수십년 된 수통은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6·25 전쟁 때 쓰던 수통이 현재 군에 없다는 답변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럼 현재의 수통과 6·25 전쟁 때 쓰던 수통 재질을 비교해볼까요? 전쟁 때 우리 장병들은 철을 주재료로 한 스테인리스 합금 수통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무거웠고 위아래 부위를 접합하는 방식이어서 옆면을 접합한 지금의 수통과는 재질과 모양이 조금 달랐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미군이 찌그러지기 쉬운 알루미늄 대신 철을 사용해 만든 신형 수통 제조 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겠지요.
아래에 컵을 끼운 미군의 ‘M1910’ 수통도 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알루미늄 재질로 제조됐다가 ‘플라스틱 뚜껑+스테인리스 몸통’, ‘플라스틱 뚜껑+알루미늄 몸통’ 등으로 변화했습니다. 지금의 수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입구가 좁게 만들어지는 등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수통에서 노르망디 해변의 냄새가 난다”, “내 수통으로 아마 어떤 분이 압록강 물을 떴을 것”이라는 말은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땐 우스갯 소리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 군 생활을 한 분이 있다면 보급 2순위인 훈련소나 동원예비군 훈련장에서 실제로 ‘노르망디 바닷물 맛’이나 ‘압록강 물맛’을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1964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체 제작한 수통의 재질은 스테인리스에서 플라스틱, 알루미늄으로 여러 번 재질이 바뀌었습니다. 1972년 처음으로 플라스틱 수통이 공급됐고 1977년 본격적으로 알루미늄 수통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옆면에 접합선이 있는 구형 알루미늄 수통입니다.

구형 수통(왼쪽)과 신형 수통(가운데·오른쪽)의 차이 한 눈에 보이나요? 신형 수통은 접합선이 없고 입구가 넓은 것이 특징입니다. 2007년 개발한 뒤 지난해가 돼서야 보급 완료했다고 합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30년 만인 2007년이 돼서야 옆면 접합선이 없는 매끈한 알루미늄 소재의 수통이 개발됐습니다. 신형 수통 무게는 기존 수통보다 40g 가벼운 200g 이하이고, 작은 생수병 두 개 분량인 980ml의 물이 들어갑니다. 고온이나 저온에서 내부 피막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완한 것은 물론 몸통의 용접선이 없어 유해물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군의 설명입니다. 새 수통을 개발해 교체했지만 2007년부터 2013년까지 교체율은 60%에 머물렀습니다. 사용 연한이 없는 수통의 특성상 많은 장병이 6·25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수십년 된 구형 수통으로 물을 마셨을 겁니다.
지난해 새누리당 정미경 의원은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들이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군 당국이 127만개의 수통을 구매했지만 새 수통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아 장병들이 여전히 30~40년된 수통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27만개의 수통을 구입하는데 든 비용은 107억원. 탄도탄 요격미사일 1발 가격입니다. 이 돈으로 63만명인 우리 장병들이 1인당 2개씩 사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수통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국방부는 즉각 해명자료를 냈습니다. 현역병과 동원예비군용 신형 수통 54만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군에서 구입한 구형 수통이 8만개, 항토예비군용 신형 수통 34만개 등 2005년 이후 제작된 수통 96만개가 이미 보급돼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추가로 보급해야 할 신형 수통 물량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역병과 동원예비군용 27만개, 항토예비군용 4만개 등 총 31만개로 추산됐습니다. 여전히 수십만명의 장병이 2005년 이전에 구입한, 오래된 구형 수통을 사용하고 었었던 겁니다. 당장 “군에선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나”라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군용 장비에 대한 불신이 워낙 뿌리깊다보니 이렇게 장갑차 전면 강철을 해머로 내리치는 시연회까지 열린 적이 있습니다. 수통에 대한 불신도 군수품에 대한 불신, 군에 대한 불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구형 수통, 폐기않고 모두 창고로 가는 이유는
이 수통,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요.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해 말까지 신형 수통 31만개를 모두 일선 부대에 보급했다”고 자신있게 밝혔습니다. 하지만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30년 만에 야심차게 개발한 신형 수통을 모든 장병들에게 보급하는데 무려 7년이 걸렸으니까요. 8만개는 여전히 2005~2006년에 구입한 구형 수통입니다. 그나마 앞으로는 ‘노르망디’나 ‘압록강’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궁금증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습니다. 신형 수통으로 바꾸면 이전에 쓰던 수통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냥 녹여서 재활용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유사시 동원병력을 위한 예비물자로 창고에 보관하게 됩니다. 군에서는 이것을 ‘치장용 장비’라고 합니다. 수십년 된 구형 수통도 곧바로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것들은 창고로 가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물자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구형 장비도 모두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래된 수통들도 쓸만한 것은 여전히 창고에 있는 것입니다.
수통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것은 사실 지난해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장병과 예비역들의 불만이 이어져 오다가 2008년 친박연대(현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이 결국 불씨를 당겼습니다. 군에서 사용하던 수통을 종류별로 구해 연구소에서 미생물 배양 실험을 한 결과 플라스틱을 제외한 알루미늄 수통과 일체형 수통에서 ‘바실러스 세레우스균’이 검출됐습니다. 바실러스 세레우스균은 대표적인 식중독균으로, 감염되면 설사와 구토, 고열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전 국민이 발칵 뒤집힐 만한 내용이었죠.
군은 당시 “서 의원실에 제출한 수통은 야전에서 실제 사용하던 제품이 아니다. 야전에서는 수통을 개인별로 지급하며, 세척 및 열탕소독을 통해 위생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급히 해명했지만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비역이 열탕소독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비릿한 물때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난다고 무조건 비위생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수통을 사용해보면 그 고정관념을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미군은 음료취수관으로 물을 먹는‘카멜백’을 개인장비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우리 특전사와 해병대에도 이 장비가 일부 보급돼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병사가 이런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유튜브 영상캡쳐
●우리 병사들도 미군처럼 ‘카멜백’ 쓴다?
물론, 바실러스 세레우스균도 섭씨 100도 이상의 물에서 가열한다고 해서 완전히 사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열에 강한 포자가 남아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죠. 135도의 온도로 4시간 가열해도 포자가 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멸균기가 없는 군부대에서 장병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훈련이 있든 없든 정기적으로 열탕소독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신형 수통은 열에 강한 내부 코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재질 변형이나 위생을 감안해 앞으로는 교체 주기를 좀 더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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